조아킴 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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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아킴 뮈라는 프랑스 혁명기부터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며 활약한 군인이자, 나폴리 왕국의 국왕이었다. 그는 1767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군에 입대하여 혁명 전쟁에 참여했고, 나폴레옹의 부관으로 발탁되어 이탈리아 원정, 이집트 원정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800년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롤린 보나파르트와 결혼했으며, 1804년 원수로 승진했다. 1806년 베르크 대공을 거쳐 1808년 나폴리 왕이 되었으나, 나폴레옹 몰락 후 배신과 복위를 반복하다 1815년 총살당했다. 그는 뛰어난 기병 지휘 능력을 갖춘 용감한 군인이었지만, 정치적 판단력 부족으로 비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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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킴 뮈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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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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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프랑스 제국 원수 프랑스 해군 원수 |
왕국 | 나폴리 왕 |
통치 기간 | 1808년 8월 1일 – 1815년 5월 20일 |
이전 통치자 | 조제프 보나파르트 |
다음 통치자 | 페르디난도 4세 |
공국 | 베르크 대공 |
통치 기간 | 1806년 3월 15일 – 1808년 8월 1일 |
다음 통치자 |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 |
출생명 | 조아킴 뮈라-조르디 |
출생일 | 1767년 3월 25일 |
출생지 | 라바스티드-포르튀니에르, 케르시, 프랑스 왕국 |
사망일 | 1815년 10월 13일 |
사망지 | 피초 칼라브로, 칼라브리아, 나폴리 왕국 |
매장지 | 페르 라셰즈 묘지 |
배우자 | 카롤린 (1800년 결혼) |
자녀 | 아실 포함 4명 뤼시앵 |
아버지 | 피에르 뮈라-조르디 |
어머니 | 잔 루비에르 |
서명 | Signatur Joachim Murat.PNG |
종교 | 가톨릭교 |
가문 | 뮈라 가문 |
군사 경력 | |
소속 |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제국 |
군 종류 | 프랑스 육군 |
복무 기간 | 1787년–1813년 |
계급 | 프랑스 제국 원수 |
주요 전투 | 나폴레옹 전쟁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이탈리아 전역 (1796–1797)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이집트 및 시리아 전역 마렝고 전투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아우스터리츠 전투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예나 전투 아일라우 전투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보로디노 전투 모스크바 점령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라이프치히 전투 나폴리 전쟁 톨렌티노 전투 |
주요 전투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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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뮈라는 1767년 3월 25일 라 바스티드-포르튀니에르(이후 그의 이름을 따서 라바스티드-뮈라로 개명)에서 태어났으며, 이곳은 기엔](현재의
2. 1. 초기 생애와 군 입대
1767년 프랑스 남서부 라바스티드-포르튀니에르(현재의 라바스티드-뮈라)에서 여관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의 바람에 따라 카오르의 생 미셸 대학을 거쳐 툴루즈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1787년 기병대에 입대하며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1] 1789년에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사임하고 가족에게 돌아가 생 세레에서 잡화상 점원으로 일했다.[1]1790년 국민방위군에 입대하여 바스티유의 날 1주년 기념 연맹 축제에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후 다시 군에 복귀하여 바렌으로의 도주 사건 당시 왕족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1] 1792년에는 헌법 경비대에 입대했으나, 무단 이탈에 대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 탈퇴했다고 주장했다.[1]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던 뮈라는 1791년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혁명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기도 했다.[1] 헌법 경비대에서 탈퇴한 후에는 헌법 의회 감시 위원회에 경비대의 반역죄를 보고하여 공화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었다.[1]
2. 2.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1795년 방데미에르 반란 진압 과정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눈에 띄어 그의 부관이 되었다. 뮈라는 파리시에 포병대를 투입하는 데 공을 세웠는데, 기병을 이용해 빼돌린 대포를 파리 시 고층 건물 옥상에 설치하는데 성공했다. 나폴레옹은 이 포병 화력으로 왕당파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11]1796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에 전속부관으로 참전했다. 이후 이집트 원정에서도 기병 지휘관으로 큰 공을 세웠다.[11] 아부키르 전투에서 뮈라는 오스만 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기병 돌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는데, 이는 앙투안-장 그로의 그림(1804)으로 묘사되었다.[1]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나폴레옹 집권에 기여했다.[11] 1800년에는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롤린 보나파르트와 결혼하여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12]

2. 3. 나폴레옹 제정 시기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자 뮈라는 프랑스 제국 원수로 승진했고, 제국 대제독 직위도 받았다.[11] 1805년 울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발을 묶은 후 항복을 받아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패배하는 결정적 요인을 제공했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는 기병대를 이끌고 프로이센군을 추격하여 섬멸했다.[11]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 기병 돌격으로 위기에 빠진 나폴레옹의 본대를 구원하고 프랑스군의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그의 경력 중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꼽힌다. 나폴레옹은 뮈라에게 "유럽 최고의 기병"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11]
아일라우 전투의 공로로 뮈라는 대공 작위에 올랐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실질적인 권한이 있는 고위직을 원했다.[11] 1806년 3월 15일, 프로이센이 여러 영토를 양도한 후 세워진 베르크 대공국의 대공이자 클레페 공작으로 임명되어 1808년 8월 1일까지 이 직함을 유지했다.[11] 1808년 5월 2일, 반도 전쟁의 시발점이 된 마드리드 민중 봉기가 일어났을 때 뮈라는 마드리드에서 프랑스 군을 지휘하고 있었다.[11]

에스파냐에서 국왕 카를로스 4세와 왕세자 페르난도 7세 사이의 권력투쟁이 계속되자, 뮈라는 양쪽 모두를 퇴위시키고 자신이 에스파냐의 왕위에 오르려는 음모를 꾸몄다.[11] 그러나 이 음모는 마드리드 폭동을 불러일으켰고,[13] 뮈라가 이끄는 프랑스 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되었으나[14] 에스파냐 사람들은 뮈라를 증오하게 되었다.[11] 결국 나폴레옹은 뮈라를 위로하기 위해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에스파냐의 왕으로 봉하고, 뮈라를 나폴리 왕국의 왕으로 임명했다.[15][16]
2. 4. 나폴리 왕 조아키노 1세
1808년 뮈라는 나폴레옹에 의해 나폴리 왕국의 왕으로 임명되었다.[15][16] 그는 나폴리의 왕이 된 후, 1812년 자유주의적 헌법을 채택하여 남부 이탈리아에 자유주의의 씨를 뿌렸다.(→나폴리 반란) 또한 이탈리아의 통일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리소르지멘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될 비밀결사들을 지원하며 민족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17]뮈라는 나폴레옹 1세에게 종속되지 않고, 개혁적인 남부 이탈리아 출신 인재를 등용하여 자립을 추구하고 국민의 이익을 고려한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정책은 일정 부분 지지를 얻어, 뮈라가 폐위 및 처형된 후에도 '뮈라파'라고 불리는 정치 세력으로 남았다.
2. 5. 배신과 몰락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뮈라는 나폴레옹을 따라 보로디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18] 모스크바에서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질서정연한 후퇴를 명령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왕국 나폴리 왕국이 걱정되어 홀로 서둘러 귀국함으로써 엄청난 재난을 초래했다.[19][20] 러시아 원정의 파국적인 결과로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자, 뮈라는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동맹국들과 협상하여 자신의 지위를 보전할 것인지를 두고 고심하며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21]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뮈라는 나폴레옹이 전투에 출진한 사이를 틈타 나폴레옹을 내쫓고 프랑스 제국의 황제가 될 야심을 품고 오스트리아와 내통하고 있었다. 뮈라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고, 오히려 외젠 드 보아르네가 출진하려는 것을 막았다. 이 때문에 프랑스 제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패배했으며, 폴란드의 용맹스러운 지휘관 조제프 안토니 포니아토스키가 전사했다.
이 애매한 중립 상태는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22] 뮈라는 빈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부르봉 왕가에 맞서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고자 했다. 빈 회의에서 오스트리아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나폴리 왕좌에 부르봉 왕가의 페르디난트 4세를 복위시키려는 연합국 동맹, 특히 영국에 의해 묶여 있었다.[3][4][5]
빈 회의에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사이,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하여 백일천하를 시작했다. 뮈라는 나폴레옹의 편에 서서 나폴리군을 동원하여 오스트리아를 향해 진격했다. 1815년 3월 15일, 나폴리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며 나폴리 전쟁을 시작했다.[4][6][7]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미 재기할 가망이 없을 정도로 몰락한 이후였다. 톨렌티노 전투에서 대패한 뮈라는 나폴리 왕국에서 쫓겨난 뒤 코르시카로 달아났다.[23]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뮈라는 코르시카로 도망갔다.[4][6][8] 그곳에서 그는 칼라브리아 침공을 시도했다.[4][7][8] 나폴레옹은 "뮈라는 8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지키지 못한 영토를 200명의 병력으로 재정복하려 했다."라고 말했다.[3] 뮈라는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4][8] 1815년 10월 13일 피초 칼라브로에서 총살로 처형되었다.[3][4][7]
3. 평가
뮈라는 고수머리의 미남으로 183cm[24]의 장신에 힘이 장사였으며, 괄괄하고 용맹한 성격을 가진 전형적인 호걸이었다. 전술적 은폐를 무시하고 화려한 복장을 즐겨 입었으나, 그의 용맹함은 적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본의 아니게 심리전에서도 승리한 셈이다.
나폴레옹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지만, 다른 원수들에 비해 군사 및 정치적 식견은 부족했다. 군사적인 부분은 장 란과 미셸 네가 보좌했으며, 뮈라는 저돌적인 전투에만 집중했다. 뮈라에 필적하는 싸움 실력을 지닌 프랑스 원수는 폴란드 장군인 조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유일했다.
겁이 없기로 유명하여, 다른 원수들과 나폴레옹이 적의 표적을 피하기 위해 대령 제복을 입을 때도 뮈라는 원수 제복을 고집했다. 총살당할 때도 눈가리개를 거부하고 자신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다.
나폴리 왕국의 국왕이 되자, 프랑스와 결별하고 나폴리 주민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 이 때문에 나폴리 사람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뮈라 사후, 그를 존경하던 나폴리 사람 중 한 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페르 라셰즈 묘지로 뮈라의 시신을 옮겨 장례를 치러주었다.
뮈라는 형의 자녀들을 맡아 양육했으며, 나폴리의 왕이 된 후 조카들에게 매달 거액의 연금을 지급했다.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오스트리아와 내통하라는 조언을 한 사람은 뮈라의 아내이자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카롤린이었다. 나폴레옹은 뮈라의 배신에 프랑스에서 인정하는 모든 칭호를 박탈했다.
뮈라의 아들은 나폴레옹이 칼 14세로부터 몰수한 작위인 퐁트 코르보 공을 받았다. 현재 퐁트 코르보 공은 1973년생의 퐁트코르보 공작 조아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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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기병 지휘관이었지만, 말에서 내리면 우유부단하고 경박하며 얕은 지혜를 보였다. 나폴레옹은 뮈라를 "적과 대치했을 때는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남자"이지만 "회의 자리에 앉혀 놓으면 판단력도 결단력도 없는 얼간이"라고 평가했다.
원수들 간의 인간관계에서, 베시에르와는 절친했지만, 장 란이나 루이 니콜라 다부에게는 혐오감을 받았다.
자신을 중세 기사에 비유하여 검에 "명예와 귀부인을 위하여"라는 좌우명을 새겼다. 여성의 찬미를 무엇보다 기뻐했던 당대 최고의 멋쟁이였던 그의 최후는 총살형이었다. 그는 "얼굴은 쏘지 말고, 곧바로 심장을 쏴라"라고 전했지만, 총탄은 그의 미모에 상처를 입혔다고 한다. 루이 18세가 뮈라의 처형을 명령한 것은 앙기앵 공 처형의 복수라고도 전해진다. 동료 원수 미셸 네도 총살형에 처해졌다.
3. 1. 군사적 재능과 한계
뮈라는 당대 최고의 기병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뛰어난 용맹성과 돌격 전술은 여러 전투에서 빛을 발했다. 특히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 보여준 기병 돌격은 나폴레옹의 본대를 위기에서 구하고 전황을 역전시킨 그의 대표적인 군사적 업적으로 꼽힌다.[11]그러나 뮈라는 기병 지휘에 특화된 인물이었고, 포병 운용 능력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기병을 이끌고 참전한 예나 전투 등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포병을 지휘했던 톨렌티노 전투에서는 큰 패배를 겪었다.[11]
또한, 뮈라는 대규모 군대를 지휘하는 능력이나 전략적 안목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폴레옹은 뮈라를 "적과 대치했을 때는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남자"이지만 "회의 자리에 앉혀 놓으면 판단력도 결단력도 없는 얼간이"라고 평가했다.[11]
3. 2. 정치적 판단과 논란
뮈라는 나폴리 왕국의 왕이 된 후, 프랑스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왕국을 건설하려 했다. 1808년 나폴리 왕으로 부임한 후, 1812년 자유주의적 헌법을 채택하여 남부 이탈리아에 자유주의의 씨를 뿌렸다.(→나폴리 반란)[17] 나폴리 주민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 이탈리아의 통일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누가 그 지도적 위치에 서느냐의 문제만 남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아, 뮈라는 자신이 그 지도적 위치에 서기 위하여 후일 리소르지멘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될 비밀결사들을 고무함으로써 민족주의의 씨도 뿌렸다.[17] 이러한 점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나폴레옹 몰락 이후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배신을 거듭한 행적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1812년 러시아 원정이 시작되자 뮈라는 나폴레옹을 따라 보로디노 전투에서 다시 큰 공을 세웠으나,[18] 모스크바에서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질서정연한 후퇴를 명령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왕국 나폴리가 걱정되어 홀로 서둘러 귀국함으로써 엄청난 재난을 초래했다.[19][20] 러시아 원정의 파국적인 결과로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자, 뮈라는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을 유지할 것인지 동맹국들과 협상하여 자신의 지위를 온존할 것인지를 두고 고심하며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21] 이 애매한 중립 상태는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22] 뮈라는 빈 회의에 대표사절단을 파견하여 부르봉 왕가에 맞서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고자 획책했다.
특히, 아내 카롤린의 부추김으로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오스트리아와 내통한 것은 그의 정치적 판단력 부족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가 발발하자 뮈라는 나폴레옹이 이 전투에 출진한 사이를 틈타 나폴레옹을 내쫓고 프랑스 제국의 황제가 될 야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내통하고 있었다. 특히 뮈라는 라이프치히 전투가 벌어져도 나폴레옹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라이프치히 전투에 출진하려는 외젠을 막았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국군은 큰 피해를 입은 끝에 패배했으며 프랑스 제국군을 도와주는 폴란드의 용맹스러운 지휘관 조제프 안토니 포니아토스키가 전사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을 배신하고 오스트리아에 붙었던 뮈라에게서 프랑스에서 인정하는 모든 칭호를 박탈했다.
4. 가족 관계
뮈라는 카롤린 보나파르트와 1800년 1월 20일 모르트퐁텐에서 시민 결혼식을 올렸고, 1802년 1월 4일 파리에서 종교 결혼식을 올렸다. 카롤린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여동생이었기에, 뮈라는 레티치아 라몰리노의 사위이자 나폴레옹의 매제가 되었다.[24] 뮈라와 카롤린 사이에는 2남 2녀의 자녀가 있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아실 뮈라(아실 샤를 루이 나폴레옹 뮈라) | 1801년 1월 21일 | 1847년 4월 15일 | 조지 워싱턴의 증손녀 캐서린 윌리스 그레이와 결혼, 후사 없음 |
레티지아 뮈라 | 1802년 4월 26일 | 1859년 3월 12일 | 귀도 타데오 페폴리 후작과 결혼, 자녀 있음 |
뤼시앙 뮈라(나폴레옹 뤼시앙 샤를 뮈라) | 1803년 5월 16일 | 1878년 4월 10일 | 캐롤라인 조지나 프레이저와 결혼, 자녀 있음, 르네 오브르조누아의 조상 |
루이즈 쥘리 카롤린 뮈라 | 1805년 3월 21일 | 1889년 12월 1일 | 줄리오 라스포니 백작과 결혼, 자녀 있음 |
장남 아실 뮈라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조지 워싱턴의 증손녀와 결혼했다. 차남 뤼시앙 뮈라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 당시 나폴리 왕국의 왕위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뮈라의 친척들은 호엔촐레른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뮈라의 사촌 마리 앙투아네트 뮈라는 호엔촐레른-지크마린겐 후작 카를과 결혼했다. 이들의 손자 레오폴트는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5. 기타
뮈라는 곱슬머리에 183cm의 장신으로 힘이 장사였고 괄괄하고 용맹한 성격의 호걸이었다.[24] 그러나 군사적 식견은 부족했으며, 특히 포병 화력은 거의 문외한이었다. 기병을 이끌 때는 승승장구했으나, 포병을 이끌 때는 힘겨워했다. 예나 전투에서 기병을 이끌고 큰 활약을 보였으나, 톨렌티노 전투에서는 포병을 이끌고 참전하여 큰 패배를 겪었다.[24]
뮈라는 나폴레옹의 최측근이었으나 다른 원수들에 비해 군사 및 정치적 식견이 부족했다. 군사적인 부분은 장 란과 미셸 네가 보좌했으며, 뮈라는 저돌적인 전투 부분만 보좌했다. 뮈라에 필적하는 싸움 실력을 지닌 프랑스의 원수는 폴란드 장군인 조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유일했다.
뮈라는 싸움은 잘했지만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능력은 부족했다. 나폴레옹은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뮈라를 위해 자신의 형을 에스파냐로 옮기고 뮈라를 나폴리의 왕으로 봉했다. 뮈라가 왕의 재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폴레옹은 위기의 순간마다 뮈라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뮈라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나폴리의 왕으로 봉했다.[24]
뮈라는 나폴리의 국왕이 되자 국기를 자신만의 나폴리 왕국 국기로 변경하고, 나폴리를 프랑스의 속국이 아닌 독립적인 왕국으로 통치했다. 프랑스에서 파견된 관리 대신 나폴리 주민들 위주로 정치를 했으며, 주요 관리들도 모두 나폴리 사람들로 임명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와 사실상 결별했지만, 나폴리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훗날 뮈라가 반란에 실패해 처형당하고 시체가 구덩이에 내팽개쳐졌을 때, 그를 존경하던 나폴리 사람 중 하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뮈라를 페르 라셰즈 묘지로 가져가서 융숭하게 장례식을 치러줬다.[24]
뮈라는 형의 자녀들을 형 대신 맡아 양육했으며, 나폴리의 왕으로 즉위하자 나폴리에서 살 수 있도록 돕고 매달 조카들에게 거액의 연금을 지급했다. 뮈라에게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오스트리아와 내통하라고 조언한 사람은 뮈라의 아내이자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카롤린 보나파르트였다.[24]
나폴레옹은 자신을 배신하고 오스트리아에 붙었던 뮈라의 모든 칭호를 박탈했다. 이후 미셸 네가 기병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의 패망을 확정지었다. 뮈라 역시 나폴레옹에게 속죄하기 위해 톨렌티노 전투에 출진했으나, 포병을 맡아 이전과 달리 기록적인 패배를 겪었다.[24]
뮈라의 아들은 나폴레옹이 칼 14세로부터 몰수한 작위인 퐁트 코르보 공을 받았다. 이후 퐁트 코르보 공은 뮈라의 후손들이 계승하고 있다. 현재 퐁트 코르보 공은 1973년생 퐁트코르보 공작 조아킴이다.[24]
5. 1. 화려한 복장과 용맹
뮈라는 전술적 은폐를 무시하고, 작전을 짜지 않은 채 무조건 돌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뮈라가 워낙 용맹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군대는 승승장구했다. 보병과 포병의 화력에 쉽게 노출되는 그의 화려한 복장은 오히려 그 용맹함으로 인해 적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뮈라는 이러한 화려함과 용맹만으로 저돌적이고 무식하게 밀어붙여 본의 아니게 심리전에서도 승리하게 되었다.[24]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서 가장 화려하게 옷을 입는 군인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뮈라였다. 다른 원수들과 나폴레옹은 적군의 표적을 피하기 위해 대령 제복을 입고 전투에 참전했지만, 뮈라는 유일하게 원수 제복을 그대로 입고 출전했다. 심지어 총살당할 때도 눈가리개를 거부하고 자신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을 정도로 겁이 없었다.[24]
5. 2. 처형과 관련된 일화
뮈라는 총살당할 때 눈가리개를 거부하고, 자신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다고 전해진다.[24] "얼굴은 쏘지 말고, 곧바로 심장을 쏴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다.[24]뮈라의 손녀의 회고록에 따르면, 마지막으로 눈을 가리지 않게 해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페르디난드 국왕의 명령에 따라 12명의 병사들이 그를 쏘도록 선택되었다. 뮈라는 병사들의 동요를 보고 "내 친구들이여, 나를 아끼고 싶다면 내 심장을 겨냥하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5. 3. 뮈라에 대한 대중문화 묘사
앙리 비달은 1955년 영화 《나폴레옹》에서 뮈라 역을 연기했다.[24] 에토레 만니는 1960년 영화 《아우스터리츠》에서 뮈라를 연기했다.[24] 피터 볼스는 1974년 드라마 《나폴레옹과 사랑》에서 뮈라 역을 맡았다.[24] 2002년 미니시리즈 《나폴레옹》에서는 클라우디오 아메도라가 뮈라를 연기했다.[24]참조
[1]
서적
[2]
웹사이트
Napoleon I – Defeat, Exile, Abdication
https://www.britanni[...]
202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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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chim Mur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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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chim Murat and the Kingdom of Naples: 1808–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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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ficare l'Italia, il sogno di Mur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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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li albori dell'unificazione politica, amministrativa e militare nazion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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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marzo 1815 – Gioacchino Murat firma il Proclama di Rimini (o di Tolent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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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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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백과] 조아킴 뮈라 (Joachim Mur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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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역사와 이야기는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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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바꾼 전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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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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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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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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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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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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